기억의 시간 쌓기

 

이상은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존재하는 ‘기억의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화두로 하여, 1990년 미국유학 후 현재까지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

 

기억은 깊을수록 애매한 무의식의 세계이지만 또한 아주 사적이고 은밀하고 정확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재된 기억의 시간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곧 이상은의 작업과정이며, 이 작업의 결과는 마치 논리로 무장된 엄격하고 계산된 미니멀리스트의 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부드러운 추상으로 자신의 감정을 화면에 드러내는 추상표현주의의 감성적인 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손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회화적인 선과 디지털 컴퓨터가 그린 건조하고 기계적인 선, 그리고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된 애매한 선 등 이러한 겹치고 또 겹치면서 만들어진 선들에 의해 평면, 입체, 설치 등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들이 제작되고 있다. 이는 회화의 한계를 뛰어 넘고, 회화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작가의 의지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작가가 반복된 선을 “마치 각각의 시간과 기억들이 쌓여진 것들에 의해 가려지고 잘 드러나지는 않는 그러나 심층 어디엔가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적은 작업노트에 비추어 보면, 표현된 물질로서의 이미지로서의 선의 해석보다는 선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심리적 상태 그 자체가 작업에 중요한 개념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작가는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심리적 여유를 확보한다면, 키치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마치 무한한 공간 속에 유한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불행한 운명이 모순과 애매함의 미학으로 승화된 듯하다. 흔히 영상매체의 광고 속에나 볼 수 있는 키치적인 색채들이다. 보라색과 노란색, 주황색과 연두색의 보색배합에 이를 중성화시키는 회색의 구성은 전통적인 드로잉, 페인팅, 판화, 영상 등 다양한 공부를 한 작가의 경력에서 나온 결과라고 본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시간은 수많은 만남과 부딪힘이 여러 겹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은 하나의 겹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 순간을 표현해보고 싶다”고 한다. 작가가 작업을 통해 지향하는 시간이 바로 현실이라는 화려함 뒤에 겹쳐진 과거와 현재의 파편화된 순간들, 쌓고 쌓인 기억들, 바로 그 기억의 선이라고 여겨진다.

 

 

2009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