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분들, 혹은 시간의 그물

 

흐름

우리는 시간에 대해 지각하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시간 자체가 비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언정 구체적인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추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상은이 그리고 있는 시간도 이런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태극(太極)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고리들(rings)>을 보면 화면의 중심으로 갈수록 운동량이 증가하고 가장자리로 멀어지면 수직선으로 펴지려는 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형태는 음양의 원리를 도형으로 표현한 태극이 완만하게 펼쳐지는 과정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면서 왠지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타원형의 소용돌이 은하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띠처럼 자른 펠트를 늘어뜨렸을 때 위에서 누르는 천의 무게와 밑에서 받치려는 압력이 만나며 만들어내는 유연한 형태를 보여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조각을 평면으로 표현한 할 때 이런 구조와 형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 구부러진 선들의 집적이야말로 시간은 직선으로 운동한다는 관념을 전복시키는 ‘시간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시간을 켜켜이 쌓는다면 그녀의 이 작품처럼 시간이 축적되면서 무게와 운동에너지에 의해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형가능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이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상상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유동성이다. 디지털매체의 도움을 받은 <Time x Time>에서는 색채와 선으로 나타난 시간의 결이 볼륨을 형성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반복적인 띠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은 시간의 속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작품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직선이다. 무수하게 많은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중첩, 교차, 교직하며 만들어내는 색채의 그물인 그녀의 작품에서 겹쳐진 선과 색채들은 시간의 화살이 남긴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수많은 직선들의 누적은 시간의 화살이 지나간 자국이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흐름’에 대해 지각한다. 그러나 그 흐름은 사실 상상된 것이며, 실제의 화면에서 시간의 화살인 선들은 정지해 있다. 짧거나 또는 길게 그어놓은 선들은 특정한 지점에서 출발해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있다. 그래서 유동성이 줄어드는 대신 부동성은 증가하여 공간에 멈춘 채 떠있는 선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흐르는 시간을 정지의 연속으로 볼 때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는 제논(Zenon)의 유명한 역설을 떠올리게 된다. 즉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화살도 어느 특정한 장소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 순간의 한 점은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날랜 아킬레스라 하더라고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는 제논의 논법을 수학의 원리나 운동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궤변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과학은 중력과 속도를 증가시키면 시간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는 지점까지 발전했으니 말이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운동의 궤적이 남아있지만 화살이 어느 순간에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양궁선수가 쏜 화살을 고속촬영한 영상을 보면 시위를 떠난 화살은 직선으로 날아가 과녁에 꽂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수면 위로 부상하며 전진하는 수영선수의 신체처럼 공간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살의 속도와 공기의 저항이 만들어내는 이 떨림이야말로 양궁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의 작품에서 공간과 공간 사이에 놓여있는 선들은 날아가는 화살을 고속카메라로 순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재현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그어놓은 선은 시간의 흐름이 결여된 것이라기보다 잠재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집적, 시간의 역사

개인이 경험한 구체적인 시간을 추상화하여 공간에 반복, 누적적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시간을 표상한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집적시켜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에 대해 그녀는 ‘시간쌓기’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상은의 작품에 대해 시간의 집적이란 표현을 했을 때 과연 시간은 부피나 체적이 있는 것인가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시간이 부피나 질량을 가진 것이라면 쌓는 것도 가능하고 그 누적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적된 시간이란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 것일지언정 구체적인 시각적 증거로 눈앞에 제시할 수는 없다. 사진이 그 역할을 할까. 아니다. 사진은 누적된 시간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 어느 시간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빛바랜 낡은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추억이며,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향수이자 위안이며,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회상인 것이다. 따라서 쌓여진 시간은 시간의 물리적 속성과 관계없는 경험과 기억의 누적을 의미한다. 질서를 갖춘 선들의 배열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시간을 더욱 단순화한 단위로 나눈 것이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그 속에 그녀가 지내온 시간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공간적 지각은 시간을 쌓는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사실 시간은 쌓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지만 말이다. 켜켜이 쌓아올린 시간의 선분은 수평과 수직으로 교직되며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있는가 하면 때로는 수많은 시선들에 의해 복잡한 구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화면은 공간의 깊이를 지니면서 동시에 그 조밀성이 강화될수록 평면으로 환원하려는 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표면에는 무수한 붓질이 만들어낸 얇은 층들이 겹쳐져 있으므로 그것을 쌓아놓은 시간이라고 해도 문제는 없다. 단순한 행위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형성된 화면은 마치 무지개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무수한 직선들이 교차하고 있는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 격자구조는 자로 잰 듯 분명하기보다 손의 압력과 붓질의 속도에 의해 아주 미세한 떨림을 지니고 있다. 직선과 색채가 만들어내는 이러한 바리에이션을 그녀는 일기에 비유한다. 마치 일기를 쓰듯 선과 색채를 쌓아올린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기억이 투영된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의 스크린에서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좋은 비교의 예로 영화를 들 수 있다. 영상이 투영되지 않는 스크린은 그저 먹통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상이 투영되는 순간 벽에 불과하던 스크린에 시간과 공간이 개입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1초에 24개 또는 30개의 프레임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환영이 벽에 비쳐진 상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운동, 행위, 시간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우리의 뇌 속에 기록된 사건이다. 동시에 기억은 개인의 습관, 취향, 경험, 사회적 관계, 세계에 대한 인식과 특별한 사건의 강렬한 충격 등이 기록된 흔적이자 자아정체성과 가치관이 녹아든 결정체이다.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기억을 복원하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기억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기억은 드라마틱한 속성을 지니기조차 한다. 그러나 기억을 단순한 형태로 환원할 수만 있다면 몇 개의 단위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각기 다른 외모와 개성을 지닌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생명의 기본단위인 DNA의 구조가 그렇듯이 말이다. 디지털을 예로 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보는 스크린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면 픽셀의 구조가 나타난다. 물론 정보의 기본구조는 0과 1로 조합된 디지트이지만 이 작은 입자들이 모여 형태는 물론 시간의 흐름을 재현한 사건까지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이상은의 작품에서 선분 하나는 한 조각의 픽셀일 수도 있고, 그것이 누적된 공간은 시간이 압축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교직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사건이 구조화된 장이자 기억을 저장하는 그물이다. 촘촘하게 얽혀있지만 투과의 틈이 있는 공간, 그 속에 시간이 거주한다.

지속

이상은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시간에 대해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비연속적 시간을 나열한 것이며, 비재현적이고 비현실적이며, 환각적이고 상징적이면서 또한 명상적인 시간의 가시화’라고 규정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것을 직선의 운동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이상은의 작품에서 기억이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상 위에 존재했던 과거를 그 선상에서 기억해낸 결과라기보다 베르그송이 말하고 있는 ‘변화하는 시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삶의 철학을 통해 생각한 시간은 지속(la durée)이었다. 이 지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며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의식에서 과거와 현재가 함께 흐르는 시간이다. 즉 그가 말하는 시간에서의 운동은 이미 지나가버려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는 과거와 현재에는 없지만 곧 다가올 미래가 공존한다. 그것에 대해 베르그송은 공간에 투사된 시간, 다시 말해 공간과 분리할 수 없는 시간이란 전통적인 관념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순수지속을 제시했다. 지속의 시간은 언어나 단위로 환원될 수 없으므로 이성에 바탕을 둔 분석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방법은 오로지 인식의 주체 스스로 시간에 동화돼 공감하는 것, 즉 직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직관은 ‘지적인 공감’이므로 그것을 통해 대상을 조각내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베르그송은 근대의 기계론적 시간론, 즉 시간을 공간적으로 파악하려는 환원주의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타난다는 인과론을 극복하고 창조적인 진화에 바탕을 둔 삶의 철학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으로부터 시간을 분리할 수 있을까. 만약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치 언덕 저 편에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시간을 절대적이며 유일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쌍둥이의 어느 한쪽이 우주선을 타고 빛에 가까운 속도로 오랜 여행을 떠났다고 하자. 그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지구에 남아있던 다른 쪽보다 훨씬 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 속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쌍둥이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속에 절대적 시간의 개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역설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특별한 절대적 시간은 없고 관측자의 위치와 운동에 의존하는 개인적인 시간만 있을 뿐이다. 실제로 우주선 밖에서 광속보다 조금 덜 빠른 우주선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우주선 안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으로 지각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1915년 이전에는 공간과 시간이 그 속에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고정된 무대처럼 생각되었으며, 이 무대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던 1905년까지만 하더라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 역시 물체들은 움직이고 힘은 끌어당기거나 또는 반발하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지속될 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공간과 시간은 이제 역학적인 양인 것이다. 즉 물체가 움직이고 힘이 작용할 때 이는 공간과 시간의 곡률(曲率)에 영향을 주고 또 한편 시공간 구조는 물체의 운동이나 힘의 작용에 영향을 주게 된다. 공간과 시간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개념 없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우주의 한계 밖에서 공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거의 변함없이 영원히 존속하는 우주란 낡은 생각은, 이제 유한한 과거에 시작되었고, 한정된 미래에 끝마칠 지도 모를 역동적이고 팽창하는 우주란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흐르는 시간은 출발점이 있기 때문에 종착점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빅뱅으로 시간이 탄생한 것처럼 우주의 붕괴와 함께 시간도 소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자들은 팽창하는 우주를 진화하는 우주의 초기단계라고 파악하고 있다.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지만 그 종말은 우주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보다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일어날 사건이므로 지금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은 여전히 지속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져왔다. 종교는 종말의 공포 못지않게 영원한 삶의 가치에 대해 가르쳐왔다. 시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소중하게 가꾸어야할 주어진 삶이지만 또한 족쇄이자 징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과연 천국에도 시간은 존재할까. 만약 천국에도 시간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간이 있기 때문에 삶의 드라마는 그만큼 변화무쌍하고 풍요로운 것은 아닐까. 인간은 시간을 측량하고 정복하기 위해 시계를 발명했지만 한때 직장인들의 삶을 척박하게 규제했던 ‘시테크’란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나마 바쁜 현대인들을 종속시키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시계는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것을 시, 분, 초 단위로 잘게 나누고 측량한 것일 뿐 시간 그 자체는 아니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본질은 흐름이며, 지속은 이미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상은에게 있어서 시간쌓기는 과거의 퇴적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함께 공존, 지속하는 운동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의 조각을 쌓아나가는 과정 속에 유동성이 발생하며, 교직의 틈, 그 사이에 현재가 틈입할 수 있는 여백이 있다. 날줄과 씨줄의 직조, 그 구조가 바로 그녀의 삶이자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시간의 그물이다.

 

 

 

미술평론가 최태만